양식은 한 번의 선적을 적는다. 브랜드의 수출 계약은 시장을 넘기는 일이다
다른 쪽이 운영하던 해외 사업을 넘겨받았을 때였다. 새 총판과 계약을 맺고 시장을 넘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그 시장을 맡던 쪽이 남은 재고를 털겠다며 아주 큰 할인율로 풀었다.
새 총판에게서 클레임이 들어왔다. 첫 물량을 들고 시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가격이 무너져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재고를 떠안은 것도 아니었다. 계약서 어디에도 이 상황을 다룬 조항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조건 하나가 아쉽다. 남은 재고는 정해진 조건으로 인수한다. 이 한 줄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수출 계약서 작성법을 찾으면 양식과 영문 샘플이 나온다. 품목, 수량, 단가, 선적, 결제. 한 번의 거래를 적기에는 충분하다. 이 글은 그 기본 칸을 제대로 채우는 법 세 가지와, 양식에 칸이 없는 한 가지를 다룬다.
1. 양식이 다루는 것과 다루지 않는 것
시중 수출 계약서 양식은 대부분 매매계약이다. 이번 선적에서 무엇을, 얼마에, 언제, 어떻게 넘기고 돈을 받는지를 적는다. 브랜드가 해외 파트너와 계속 거래한다면 그 위에 한 층이 더 필요하다. 지역과 독점, 가격 정책, 파트너가 바뀔 때의 정리. 이 층은 총판 계약서 글에서 여섯 조항으로 다뤘다.
2. 가격 조건: 단가 옆에 인코텀즈와 장소를 쓴다
단가만 적힌 계약서는 반쪽이다. 그 가격에 운임이 들어 있는지, 보험은 누가 드는지, 물건이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면 누가 손해를 보는지가 빠져 있다. 이걸 정하는 국제 규칙이 국제상업회의소(ICC)의 인코텀즈(Incoterms)다. 지금 쓰이는 판은 2020년판이다.
가장 흔한 오해가 CIF다. 판매자가 도착항까지 운임과 보험료를 내니, 위험도 도착항까지 판매자가 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아니다. 위험은 선적항에서 배에 실리는 순간 구매자에게 넘어간다. 비용이 끝나는 곳과 위험이 넘어가는 곳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계약서에는 단가 옆에 세 가지를 같이 쓴다. 규칙 이름, 장소, 판 번호. 예를 들어 “FOB 부산, Incoterms® 2020”. 컨테이너로 보내는 물건이라면 ICC는 FOB 대신 FCA를, CIF 대신 CIP를 쓰라고 권한다. 그리고 인코텀즈는 소유권이 언제 넘어가는지나 대금을 언제 내는지는 정하지 않는다. 그건 계약서 본문에서 따로 정해야 한다.
3. 결제 조건: 선금과 잔금을 숫자로 쓴다
결제 조건은 크게 두 갈래다. 은행 송금(T/T)과 신용장(L/C).
어느 쪽이든 은행 수수료를 누가 내는지, 어느 통화로 받는지도 같이 적는다. 적어 두지 않으면 금액이 매번 조금씩 어긋난다.
4. 품질과 클레임: 기한을 적지 않으면 길어진다
물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구매자가 언제까지,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를 정하는 조항이다. 양식에는 대개 “하자가 있으면 협의한다” 정도로 들어가 있다.
이 칸을 비워 두면 생각보다 길게 열려 있을 수 있다. 한국은 2005년부터 유엔 국제물품매매협약(CISG) 당사국이다. 계약서에서 따로 배제하지 않았고 상대 나라도 당사국이면 이 협약이 적용될 수 있다. CISG 제39조는 구매자가 하자를 발견했거나 발견할 수 있었던 때부터 합리적인 기간 안에 알리도록 하면서, 최장 기한을 물건을 넘겨받은 날부터 2년으로 둔다.
세 가지를 숫자와 절차로 적어 두면, 1년 뒤에 도착한 클레임을 두고 다툴 일이 줄어든다.
5. 양식에 없는 것: 파트너가 바뀔 때의 재고
도입부의 장면으로 돌아가자. 떠나는 쪽이 재고를 큰 폭으로 할인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업을 접기 전에 재고를 현금으로 바꿔야 한다. 누가 사 주지 않으면 값을 내려서라도 팔 수밖에 없다.
처음 떠오르는 해법은 “기존 할인율로만 팔라”는 조건이다. 그런데 이건 조심해야 한다. 판매자의 판매가격을 정해 주는 조건은 한국에서는 공정거래법 제46조의 재판매가격유지에 걸릴 수 있고, 다른 나라도 대개 비슷한 규제를 둔다.
더 확실한 방법은 할인할 이유를 없애는 것이다. 떠나는 쪽에 소진 기한을 넉넉히 주고, 기한이 지나 남은 재고는 새 총판이나 브랜드가 정해진 값에 인수한다고 미리 약속한다. 헐값에 던지지 않아도 재고가 현금이 되니, 던질 이유가 사라진다. 기한과 지원의 선을 긋는 법은 계약 해지 글에서 다뤘다.
새 총판과 맺는 계약에도 이 조건이 들어가야 한다. 넘겨받는 재고의 수량과 가격, 유통기한 기준, 그리고 전환 기간 동안 시장 가격이 무너졌을 때 누가 무엇을 보전하는지. 새 파트너의 첫해는 이 조항에서 갈린다.
정리
직접 확인해 볼 것
이 글에 쓴 규칙과 법령의 출처
- 인코텀즈 —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ncoterms® 2020, 2019 발간·2020. 1. 1. 시행.
- 신용장통일규칙 — ICC, Uniform Customs and Practice for Documentary Credits (UCP 600), 2007.
- 국제물품매매협약 —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Contracts for the International Sale of Goods (CISG), 1980. 한국은 2005. 3. 1.부터 적용. 제39조(부적합 통지).
-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의 금지 —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46조.
함께 읽기 · 총판 계약서 작성 가이드 — 양식이 빈칸으로 남겨두는 여섯 조항 · 대리점 계약 해지, 통보하기 전에 — 사유마다 달라지는 세 가지 끝내는 법 · 해외 에이전트 계약서, 쓰기 전에 — 결국 총판으로 바꾸게 되는 이유
이 글의 사례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국가·회사·브랜드·개인·수치를 모두 빼고 구조만 남긴 것입니다. 본문의 비율과 기한은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입니다. 법률 자문이 아니며, 실제 계약은 전문가 검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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