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정, 상대의 위반, 서로의 합의. 이유가 다르면 쥐고 있는 카드도 다르다
비딩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다. 결과를 알리는 공문보다 먼저, 떨어질 쪽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회사가 그 브랜드를 가장 잘할 수 있는 한 파트너에게 맡기기로 방향을 정한 뒤였다. 오래 같이 일한 곳들이었고, 다들 거래가 이어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계약서로만 보면 할 말은 간단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새 계약을 맺지 않는다.
그래도 공문 한 장으로 끝내지 않았다. 마주 앉아 이번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고 먼저 말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대리점 계약 해지를 검색하면 해지 통보 공문 양식과 내용증명 쓰는 법이 나온다. 필요한 정보다. 하지만 공문은 마지막 장이다. 공문을 보내기 전에 먼저 정할 게 있다. 이 해지가 어떤 종류인가.
1. 해지 사유는 셋, 쥐고 있는 카드가 다르다
겪어 본 해지는 크게 세 갈래였다. 우리 쪽 전략이 바뀌어 거래선을 줄인 경우, 상대가 계약을 어긴 경우, 실적이 안 나와 서로 합의하고 끝낸 경우.
양식의 해지 조항은 보통 가운데 칸만 다룬다. 상대가 계약을 위반했거나, 부도가 났거나, 영업을 못 하게 된 경우다. 실제로는 양옆 칸이 더 흔하다. 상대가 잘못한 게 없는데 끝내야 하거나, 누구 잘못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끝내야 한다.
2. 우리 사정으로 끝낼 때: 먼저 알리고, 재고의 길을 열어 준다
상대는 잘못한 게 없다. 그래서 가장 서운해한다. 이때 가장 깔끔한 방법은 중도 해지가 아니라 계약 기간 만료에 맞춰 갱신하지 않는 것이다. 계약서에 적힌 기간은 끝까지 지키고, 새 계약을 맺지 않는다. 다툴 거리가 크게 줄어든다.
국내 대리점이라면 하나를 확인해 둔다. 갱신 거절과 해지 절차를 법으로 정하자는 대리점법 개정안이 2021년과 2024년에 발의된 적이 있다. 해지를 앞두고 있다면 그 시점의 법령을 확인해야 한다.
조항보다 중요한 건 순서였다. 결과를 공문으로 먼저 받게 하지 않았다. 대표에게 먼저 전화하고, 만나서 말했다. 마케팅 연구에도 같은 결과가 있다. 니르말야 쿠마르와 동료들이 1995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공급업체에 기대는 처지의 판매점은 무엇을 받았느냐(분배 공정성)보다 어떻게 대우받았느냐(절차 공정성, procedural fairness)에 관계의 질이 더 크게 반응했다. 결과를 바꿀 수 없을 때 바꿀 수 있는 건 전달 방식이다.
알리고 나면 요구가 온다. 대개 세 가지였다.
세 번째가 이 해지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었다. 떨어진 파트너를 경쟁자로 내보내지 않고 새 파트너의 거래처로 바꿨다. 그리고 새 파트너에게 부탁했다. 오래 거래해 온 곳이니 이번에는 마진을 최대로 보려 하지 말고, 그들이 전에 받던 가격에 최대한 맞춰 달라고.
이렇게 하면 두 가지가 줄어든다. 남은 재고를 헐값에 던지는 일, 그리고 거래가 끊기면서 생기는 시장 공백. 둘 다 결국 브랜드 가격을 흔든다.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한다. 국내 거래에서 새 파트너가 받을 가격을 정해 주고 따르게 하면 재판매가격유지가 될 수 있다. 부탁과 강제는 다르다. 이 선은 총판 계약서 글에서 다뤘다.
3. 상대의 위반으로 끝낼 때: 싸움은 증거에서 끝난다
우리가 보낸 물건이 계약에 없던 곳에서 팔리고 있었다. 한 온라인 사이트였다. 알아챈 건 로트 번호 덕분이었다. 그 대리점에는 특정 로트, 특정 라인만 보냈기 때문에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 바로 확인됐다.
대리점은 자기들 책임이라고 인정했다. 다른 도매상에 넘긴 물량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자기들도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계약을 끝내겠다고 하자 반발이 컸다.
그래도 법적으로 다툴 일은 아니었다. 계약서에 이미 미리 합의한 유통 경로로만 공급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누가 옳은지 가릴 필요가 없었다.
돌아보면 두 가지가 같이 있어서 가능했다. 하나만 있었다면 “모른다”는 말에서 멈췄을 것이다.
국내 거래라면 한 가지 확인이 필요하다. 판매 지역이나 거래 상대를 제한하는 조건이 경쟁을 부당하게 막으면 공정거래법 제45조의 구속조건부거래가 될 수 있다. 브랜드 관리나 품질 유지 같은 이유가 있는지, 그 이유와 제한의 범위가 맞는지를 따진다. 해외라면 현지 경쟁법을 확인한다.
4. 합의로 끝낼 때: 기한은 넉넉하게, 선은 단단하게
판매가 부진했고 적자도 컸다. 어느 한쪽이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두 회사가 합의하고 거래를 끝냈다.
먼저 재고를 줄일 강한 판촉안을 제안했다. 재고를 소진할 기한은 충분히 줬고, 그 안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했다. 대신 기한이 지나면 어떤 지원도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두 가지는 짝으로 움직인다. 기한이 짧으면 상대는 재고를 헐값에 던지고, 그 가격이 시장에 남는다. 기한이 넉넉해도 선이 흐리면 지원 요청이 끝나지 않는다. 넉넉한 기한이 단단한 선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해외 거래처라면 더 꼼꼼해야 한다. 끝난 뒤에 다시 마주 앉기가 어렵다. 합의한 내용은 합의서로 남긴다. 소진 기한, 지원의 범위와 금액, 기한 뒤에는 추가 지원이 없다는 문장, 그리고 서로 더 청구할 것이 없다는 정산 확인까지 적어 두면 좋다.
5. 해지 통보 공문에 넣을 것
공문은 마지막 순서다. 앞의 과정을 거쳤다면 공문은 이미 예고했거나 합의한 내용을 확인하는 문서가 된다. 그래도 빠지면 안 되는 항목이 있다.
보내는 방식은 계약서의 통지 조항을 따른다. 국내라면 내용증명 우편으로 보내 발송 사실과 내용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해외라면 계약서가 정한 주소와 방식으로 보내고, 받았다는 확인을 받아 둔다.
정리
직접 확인해 볼 것
이 글에 쓴 개념과 법령의 출처
- 절차 공정성(procedural fairness) — Nirmalya Kumar, Lisa K. Scheer & Jan-Benedict E. M. Steenkamp, "The Effects of Supplier Fairness on Vulnerable Resellers", Journal of Marketing Research 32(1), 1995, pp. 54–65.
- 구속조건부거래 —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45조(불공정거래행위의 금지), 공정거래위원회 「불공정거래행위 심사지침」.
- 재판매가격유지행위 — 같은 법 제46조.
- 대리점 계약 갱신·해지 절차 개정안 —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2021. 9. 김한정 의원 대표발의 / 2024. 7. 이강일 의원 대표발의, 의안번호 220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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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사례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국가·회사·브랜드·개인·수치를 모두 빼고 구조만 남긴 것입니다. 법률 자문이 아니며, 실제 해지는 변호사 검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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