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는 사이가 좋을 때 쓰고, 사이가 나빠졌을 때 읽는다
총판 계약서를 쓸 때는 대개 양식부터 구한다.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 조항 스무 개 남짓, 빈칸 몇 개, 서명란. 빈칸을 채우면 계약서가 된다.
문제는 그 계약서를 다시 펼치는 날이다. 그날은 보통 사이가 좋지 않다. 물량이 목표에 못 미쳤거나, 가격이 무너졌거나, 한쪽이 이제 그만하자고 말한 날이다. 회의실 탁자에 계약서 사본이 놓이고, 양쪽이 같은 조항을 서로 다르게 읽기 시작한다.
그때 자주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다. “협의하여 정한다.” 남은 재고는 협의하여 처리한다. 해지 후 상표 사용은 협의하여 정한다. 사이가 좋을 때는 더없이 합리적인 문장이다. 사이가 틀어진 뒤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문장이 된다.
이 글이 양식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양식에 있는 조항 대부분은 그대로 써도 된다. 결과를 가르는 건 여섯 개 정도이고, 그 여섯 개를 헤어지는 날을 기준으로 채우는 법을 정리했다.
1. 양식의 조항 열여덟 개, 결과를 가르는 건 여섯 개
시중 양식을 몇 개 겹쳐 보면 구성이 거의 같다. 목적과 정의로 시작해서 지역, 기간, 가격, 주문, 결제를 지나 해지와 분쟁 해결로 끝난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관계가 끝날 때까지 다시 읽히지 않는다. 비밀유지나 통지 조항 때문에 싸우는 일은 드물다. 다시 펼쳐지는 조항은 정해져 있다.
계약서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부 적을 수 없다는 점을 경제학에서는 불완전 계약(incomplete contracts)이라고 부른다. 올리버 하트와 존 무어가 1990년에 정리한 개념이다. 전부 적을 수 없으니 전부 적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대신 다툼이 생길 자리에는 숫자와 절차를 적어 둬야 한다. “협의하여 정한다”는 바로 그 자리를 비워 두는 문장이다.
2. 총판과 대리점, 무엇이 다른가
조항으로 들어가기 전에 확인할 게 하나 있다. 이 계약이 어떤 관계를 만드는지다. 이름은 기준이 못 된다. 현장에서는 총판, 대리점, 에이전트가 뒤섞여 쓰인다.
법적으로 갈리는 기준은 하나다. 물건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파는가, 아니면 본사 물건을 본사 이름으로 팔아 주고 수수료를 받는가. 앞쪽이 총판(distributor)이고, 뒤쪽이 상법 제87조가 정한 대리상(agent)이다.
이 구분이 중요한 건 뒤에 나올 조항 세 개가 여기에 달려 있어서다. 판매가격을 누가 정할 수 있는지, 끝났을 때 남은 재고가 누구 것인지, 헤어질 때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
국내 거래라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업종별로 공개한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를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 2016년 12월 시행된 대리점법(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의 기준이 반영된 양식이다.
3. 헤어지는 날 기준으로 채우는 여섯 조항
여섯 조항은 관계가 흘러가는 순서대로 하나씩 등장한다. 앞의 세 개는 거의 모든 양식에 들어 있지만 한 줄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뒤의 세 개는 대개 비어 있다.
(1) 지역·독점: 좁게, 그리고 따로따로
독점을 준다면 지역, 채널, 품목, 기간을 각각 따로 적는다. “OO 지역 독점”이라고 한 줄로 쓰면 온라인도, 신제품도, 기간 연장도 전부 딸려 간다. 이 부분은 앞선 글에서 다섯 개의 다이얼로 자세히 다뤘다. 독점을 줄지 말지부터 고민 중이라면 이 글을 먼저 보자.
(2) 최소구매량: 계단식으로, 합의한 기록과 함께
고정 물량은 첫해에는 너무 높고 셋째 해에는 너무 낮다. 해마다 올라가는 계단식이 낫다. 조건의 일부는 사간 물량이 아니라 실제로 팔린 물량에 묶는다. 사간 물량만 보면 총판 창고에 재고가 쌓이는 것만으로도 목표가 채워진다.
국내 대리점 거래라면 하나를 더 챙긴다. 대리점법 제8조는 공급업자가 판매목표를 부당하게 강제하지 못하게 한다. 목표를 두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한쪽이 정해서 통보하고, 못 채우면 불이익을 주는 구조가 문제다. 목표는 협의해서 정하고, 협의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3) 가격: 판매가격 대신 공급 구조를 적는다
브랜드 쪽에서 가장 넣고 싶어 하는 문장이 있다. “총판은 권장소비자가격 이하로 판매하지 않는다.” 국내 거래라면 이 문장은 넣으면 안 된다.
공정거래법 제46조는 판매업자의 판매가격을 정해 주는 행위, 곧 재판매가격유지(resale price maintenance)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최저가뿐 아니라 최고가 지정도 포함된다.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더 크다는 식의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예외지만, 그걸 입증할 책임은 사업자에게 있다. 계약서에 ‘권장’이라고 적어도 발주 중단이나 판촉 제외 같은 제재가 따라붙으면 강제로 본다.
그래서 가격을 지키고 싶다면 판매가격이 아니라 공급 쪽을 적는다. 공급가를 언제, 어떤 기준으로 조정하는지. 판촉 비용을 어떤 조건에서 누가 얼마나 내는지. 가격이 무너지는 원인은 대개 총판의 판매가가 아니라 공급 구조에 있다. 공급가를 두고 벌어지는 줄다리기는 이 글에서 다뤘다.
해외 총판이라면 현지 경쟁법이 기준이 된다. 나라마다 허용 범위가 다르니 현지에서 확인해야 한다.
(4) 계약 해지: 해지보다 전환을 먼저 적는다
해지 사유에 “상대방이 계약을 위반한 경우”만 적어 두면, 가장 흔한 상황에서 쓸 조항이 없다. 가장 흔한 상황은 위반이 아니라 부진이다. 계약을 어기지는 않았는데 기대만큼 팔지 못하는 경우다.
이때 실제로 쓸 수 있는 건 해지권이 아니라 전환 조항이다. 목표를 두 해 연속 채우지 못하면 독점이 비독점으로 바뀐다는 식이다. 해지는 양쪽 모두에게 부담이 커서 좀처럼 꺼내지 못한다. 쓸 수 없는 조항은 협상에서 힘이 되지 않는다.
해지 조항 자체에는 통지 기간을 숫자로 적는다. 예를 들어 90일 전 서면 통지. 이 기간은 바로 뒤에 나올 재고 판매 기간과 맞물려야 한다.
(5) 해지 후 재고: “협의하여 처리한다”를 숫자로 바꾼다
관계가 끝날 때 가장 많이 부딪히는 곳이 여기다. 총판 창고에는 우리 재고가 남아 있다. 총판은 산 값에 되사 달라고 하고, 브랜드는 싸게 풀리는 걸 막고 싶다. 양식은 대개 이 자리를 “협의하여 처리한다”로 비워 둔다. 채울 칸은 세 개다.
숫자는 계약마다 다르다. 중요한 건 숫자가 적혀 있느냐다. 사이가 틀어진 뒤에 이 숫자를 새로 정하려 하면 가진 쪽이 유리하다. 재고를 쥔 쪽은 총판이다.
(6) 명의와 고객: 끝나는 날 누구 이름으로 남는가
양식에서 가장 자주 빠지는 조항이다. 해외에서는 수입 허가나 제품 등록이 현지 총판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업종에 따라 등록을 새로 받는 데 몇 달이 걸린다. 계약이 끝나도 등록이 총판 이름에 묶여 있으면, 새 파트너로 넘어가는 동안 그 시장에서 물건을 팔 수 없다. 현지 상표 출원과 온라인 몰의 공식 스토어 계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 가지를 적는다. 등록과 계정의 명의를 누구로 하는가. 총판 명의로 할 수밖에 없다면 종료 후 며칠 안에 누구에게 넘기는가. 넘기는 데 드는 비용은 누가 내는가.
고객 정보를 넘겨받는 조항은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 대법원은 2013년 판결(2011다28342)에서, 자기 이름으로 사서 파는 판매업자라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대리상의 보상청구권(상법 제92조의2)을 유추해 적용할 수 있다고 봤다. 요건은 세 가지다. 대리상과 비슷한 일을 했는지, 계약이 끝날 때 고객 정보를 넘길 의무가 있었는지, 대리상만큼 보호할 필요가 있는지. 고객 정보를 넘겨받으면 다음 파트너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보상 청구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 조항은 변호사와 함께 보는 게 맞다.
4. 해외 총판 계약서라면 먼저 볼 세 가지
해외 총판은 위의 여섯 조항에 세 가지가 더 붙는다. 다툼이 생기면 어느 나라 법으로 볼 것인가(준거법), 어디서 다툴 것인가(재판 또는 중재), 어느 언어본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셋 다 사이가 좋을 때는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상대 나라 법원에서 그 나라 말로 다투게 되면, 여섯 조항을 아무리 잘 적어 뒀어도 해석은 상대방 쪽에서 시작된다. 국제 거래에서 제3국 중재를 자주 고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재 판정은 뉴욕협약에 가입한 나라들 사이에서 집행할 수 있다.
정리
직접 확인해 볼 것
이 글에 쓴 개념과 법령의 출처
- 불완전 계약(incomplete contracts) — Oliver Hart & John Moore, "Property Rights and the Nature of the Firm",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98(6), 1990.
- 대리상의 정의와 보상청구권 — 상법 제87조, 제92조의2. 판매업자에 대한 유추적용 요건은 대법원 2013. 2. 14. 선고 2011다28342 판결.
-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의 금지 —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46조, 공정거래위원회 「재판매가격유지행위 심사지침」.
- 판매목표 강제 금지 —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2016. 12. 23. 시행) 제8조. 공정거래위원회 업종별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
- 중재 판정의 집행 — 외국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협약(뉴욕협약), 1958.
함께 읽기 · 총판이 독점을 달라고 할 때 — 줄지 말지 정하는 세 가지 질문 · 독점을 주기로 했다면 — 되찾을 길을 계약서에 남기는 법 · 총판이 공급가를 깎아달라고 할 때 — 답하기 전에 확인할 한 가지
이 글의 장면과 숫자는 이해를 돕기 위한 가상의 예시입니다. 법률 자문이 아니며, 실제 계약은 변호사 검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비즈니스 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독점을 주기로 했다면 — 되찾을 길을 계약서에 남기는 법 (0) | 2026.09.13 |
|---|---|
| 총판이 독점을 달라고 할 때 — 줄지 말지 정하는 세 가지 질문 (1) | 2026.09.10 |
| 총판이 공급가를 깎아달라고 할 때 — 답하기 전에 확인할 한 가지 (0) | 2026.09.10 |
| 동남아 이커머스, 총판에 맡길까 직접 할까 — 전환 시점을 정하는 5개 지표 (0) | 2026.09.07 |
| "개인화 마케팅의 힘: 고객 데이터를 활용한 전략" (0) | 2025.03.14 |
| 이커머스 로지스틱스의 혁신: 빠른 배송이 고객을 사로잡는 방법 (0) | 2025.03.13 |
| 글로벌 이커머스의 미래: 2030년까지 꼭 알아야 할 7가지 트렌드 (0) | 2025.02.25 |
| 무역의 기초, 인코텀즈에 대해서 (2) | 2025.02.24 |